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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비야 공원
1919년 2월 12일과 19일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곳



최팔용ㆍ윤창석ㆍ김도연ㆍ이종근ㆍ이광수ㆍ송계백ㆍ김철수ㆍ최근우ㆍ백관수ㆍ김상덕ㆍ서춘 등 일본 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ㆍ8학생독립선언을 추진하였다.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국유학생 대회를 열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일본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려다가 일본경찰의 제지로 실패하고 60여 명이 체포되었다.



2.8 독립선언서
2ㆍ8독립선언서는 '한일합방'이 한국인의 뜻에 반하는 것인 만큼 일본은 한국을 독립시킬 것,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한국합병을 솔선 승인한 죄가 있으므로 속죄의 의무를 질 것,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우리 민족이 생존을 위해 자유행동을 취해 독립을 달성할 것 등을 선언했다.
그런데 왜 히비야 공원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을까요?
히비야 공원은 일왕이 사는 고쿄(황거)와 주요 정부 관청에 둘러싸여 있다. 메이지 정부는 일본이 다른 서양 국가에 뒤처지지 않은 법 제도를 가진 나라임을 과시하기 위해, 1886년에 독일 건축가를 초청하여 관청집중계획에 착수한다. 고쿄를 중심으로 국회의사당, 재판소, 법무성을 우선 설계하고, 이듬해(1887년)에 다른 관청들을 설계한다. 그리고 1894년 일본 최초의 서양식(독일식)공원인 히비야 공원을 고쿄와 법무성 근처에 설계했다.
고쿄와 주요 관청에 인접해 있는 히비야 공원은 메이지 시대부터 각종 국가 이벤트가 거행되는 장소이자, 정치 운동의 근원지였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의 광화문에 해당하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은 구속될 각오로 가장 영향력 있는 장소에서 독립운동을 거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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