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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테일러
앨버트 W. 테일러는 본래 광산업 및 무역업자로 이 시기 연합통신(AP, Associated Press)으로부터 고종의 장례식을 취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상태였다.
이 때부터 그는 언론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앨버트는 3월 1일에 아내 메리 L. 테일러가 아들을 낳아 입원하고 있던 세브란스병원에서 침대 속에서 '독립선언서'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한국어에 능통했던 앨버트는 이것이 독립선언서라는 것을 알아챘고, 즉시 관련기사를 작성해 독립선언서와 함께 동생 월리엄에게 전달하였다.
월리엄은 이것들을 구두 뒤축에 숨겨 일본 도쿄로 가져가서 전신으로 미국에 보냈다. 그 기사는 1919년 3월 13일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에 다음과 같은 제목이 실렸다.

"KOREANS DECLARE FOR INDEPENDENCE
(조선인의 독립 선언)"
Thousands Who Engage in Demonstration Are Arrested by the Japanese
(시위에 참가한 수천 명이 일본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앨버트가 연합통신에 전달한 독립선언서는 영문으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뿌려졌다고 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엘버트 W. 테일러는 구금되고, 메리 L. 테일러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1942년 조선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테일러 부부는 강제로 한국을 떠나야 했다.
앨버트는 다시 한국에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1948년 6월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이후 메리는 남편의 유해와 함께 1948년 9월 인천으로 입국하였다.
마음의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항상 바랐던 엘버트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에 묻혔고, 메리는 한국을 떠나가 전 마지막으로 딜쿠샤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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