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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의 전면

금강호

1917년, 미국인 파일럿 아서 로이 스미스가 용산 연병장에서 선보인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에 대한 꿈을 가진 안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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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비행기들 여기저기에서 떼어온 부품으로 간신히 맞춰놓은 모양세의 불안했던 1인승 복엽기 비행기 금강호.

 좋은 엔진을 가지지도 못한 금강호는 우리나라 비행사 안창남이 1922년 12월 10일 최초로 조선의 상공을 날았던 역사적인 비행이다.

 일제강점기 서울 여의도 허허벌판에 5만여명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 안창남 비행사가 조종하는 비행기가 하늘 높이 치솟는 모습을 보며 환희했었다. 서울 하늘을 날았던 조선인이 몰았던 최초의 비행기가 바로 금강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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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호는?

 안창남 비행사가 고국 상공을 비행하기 한 달 전인 1922년 11월 일본제국비행협회에서 시행한 우편 비행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안창남 비행사는 이전에도 몇 차례 비행대회에 참가하려고 했었지만, 그가 탈 비행기가 없어 참가 할 수 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비행기 한 대를 빌릴 수 있었다. 150마력, 낡은 1인승 복엽기.

 

 그마저도 고장난 채 방치되어 있어 안창남 비행사의 지인들은 사고가 날 수 있다며 비행을 말렸다. 하지만 안창남 비행사는 포기하지 않고 비행 시 수리를 시작한다. 고장이 난 부품을 낡은 비행기 여기저기서 떼다가 붙여 놓은 그의 비행기는 다른 참가자들의 비행기에 비해 성능이 크게 떨어졌지만, 도쿄-오사카의 왕복 비행에 성공했고 일본인들을 제치고 우승을 하게 되지요.

 일본 대회에서 우승한 이후, 고국에 방문해 비행을 선보이기로 했던 안창남 비행사는, 조선인으로서 최초로 조선의 하늘을 비행하게 되었다.

 

 여의도에서 이륙해 마포를 지나 서대문 형무소를 내려다 보고, 독립문을 지나 자신의 고향에 인사를 한 뒤에 광화문과 경복궁, 창덕궁을 선회하며 칩거중이던 순종에게 예를 표했다.

 

 그는 민족 자긍심을 불어 넣기 위해 비행을 하며 '우리도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내용의 전단지를 흩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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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호

금강호와 안창남의 독립운동

 조선과 일본에서 꽤 유명세를 타고 있던 안창남은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 비행학교 설립에 힘쓰고 비행교관을 역임하게 된다. 안창남은 독립운동을 위해 군사양성을 계획하고 상당한 독립운동 자금도 지원한다. 안창남 비행사 처럼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조선 비행사들 일부가 그를 따라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한다. 

 

 비록, 안창남 비행사가 항공학교 비행 연습 도중 추락하여 순국했지만 그의 독립운

동 정신을 이어 받은 많은 조선인 비행사들은 꿋꿋하게 독립운동을 이어 갔다.

 

 안창남 비행사는 중국과 임시정부하에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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