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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최재형 선생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역에서 활동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러시아식 이름은 표트르 세묘노비치 초이(Пётр Семёнович Цой)이며, 다른 이름으로 최재형, 최도헌, 별명으론 최 페티카, 최 비지깨가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운동의 대부 "페치카" 최재형 선생

 러시아 상선 선장의 도움으로 러시아에서 교육받은 최초 조선이었다. 하급 선원, 무기 공장 노동자 등 각고의 노력 끝에 1900년대 초 러일전쟁으로 인한 특수로 군수 산업 분야에서 큰 돈을 벌어 마흔 살이 되기도 전에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다.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성실하고 유능해 많은 러시아인이 최재형에게 통역, 도로·막사 공사 하청, 식료품 등 군납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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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독립을 위해 최재형은 무장 투쟁의 정신상 지주이자 자금원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 최재형은 국외 최대 독립운동단체인 동의회를 세우고 총장으로 취임했다.

 동의회는 최재형이 내놓은 13,000루블, 이위종의 부친이 전해온 10,000루블, 최재형과 안중근이 모금한 6,000루블을 기금으로, 6월 총대장 이범윤에 안중근을 참모 중장으로 한 연추 의병을 창설했다. 

 

 연추 의병은 7월부터 국내의 홍범도부대 등과 연합작전을 펼쳐 접경 지역의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최재형은 재정난 탓에 폐간되었던 〈大東共報(대동공보)〉를 인수하고 재발행해  일본제국을 비판하고 한인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하였다.

 안중근도 여기에서 근무하면서 때를 기다리도록 했다. 1909년 10월, 안중근과의 이토 히로부미 살해 거사도 최재형의 후원으로 성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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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강제 병합 이후 러시아는 항일 운동을 더욱 강하게 탄압했고 〈대동공보〉도 폐지되었다. 당시 연해주는 망명한 독립 지사의 집결지였는데 최재형은 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최대 한인 단체인 권업회를 꾸리게 된다. 이 권업회는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를 출범하며 국외에서 가장 먼저 정부 조직을 꾸린 단체가 된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치루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일본의 동맹국이 되면서 결국 권업회는 해산되고 만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일본의 요구로 인해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고 결국 1916년 7월 최재형은 러시아 당국에게 체포되어 우수리스크로 압송된다. 다행히 우수리크스에서 영향력이 강했던 그의 첫째 사위의 덕을 보며 석방된다.

 1918년 6월 제2회 특별 전로한족대표회의에서 이동휘와 함께 명예회장으로 선출된다.

 

 여기서 조직된 전로한족중앙총회가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최재형은 외교부장으로 선출된다. 또한 4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그를 재무총장으로 추대하기도 한다.

 

 이렇게 그는 3.1운동을 계기로 활발해지는 독립운동사에서 중심 인물로 자리잡았다. 

 이후 최재형은 일본군의 손에 안타깝게 처형되었으며 이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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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Z. 독립운동자금을 획득하라.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무장 투쟁의 정신상 지주이자 자금원으로 활약하였으며1908년 국외 최대 독립운동단체인 동의회를 세우고 총장으로 취임한 인물은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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