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천택 이야기
임천택 선생 1903년 출생하여 3살 때 어머니의 품에 안겨 멕시코행 배를 탔다. 어머니를 따라 멕시코에 정착해서 성장하며 15년간 살았던 임천택 선생은 18세 때 쿠바 마탄사스로 이주하여 에네켄 농장에서 노동자로 살았다.
이곳에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마탄사스와 카르데나스 지역에 한국어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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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택은 쿠바의 한인지방회를 규합하여 '재쿠바 한족단'을 만들고 1934년부터 상해 임시정부와 직접 연락을 주고 받으며 독립자금 모금 등 광복운동 후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미국 멕시코 쿠바가 제위로 만여 명인데, 그들 대다수가 노동자였지만 애국심이 강했다...쿠바의 임천택, 박창운 등 모두가 임시정부를 후원해 주었다...쿠바의 한인 교포는 전부가 정부 유지 발전에 공동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고 밝혀 임천택 등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고 있다.
한족단은 당시 쿠바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정치활동 인가를 받은 뒤 임시정부 후원과 쿠바거주 한인들의 한전 보장, 한국독립 승인에 대한 선전작업, 독립후원금 모금 등에 관한 공식활동에 들어가 1937년 부터 1944년까지 국민회 의무금과 광복군 후원금, 독립자금 등으로 상당액을 보내면서 임시정부의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임천택 선생은 천도교 교 회활동,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민성국어학교와 진성국어학교 등 한글을 통한 민족교육도 적극으로 주도하였다. 이 무렵 이미 임천택 선생은 쿠바에서의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

About 임천택
임천택 선생 등 쿠바한인들은 국민회지방회를 통해 1937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360.52원, 1940년 말부터 41년 초까지 78.30원, 그리고 1941년 10월부터 12월까지 858.88원을 모금해 재미국민회와 중경임시정부 김구에게 송금했다.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한 그의 독립운동은 백범 김구 일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시기 쿠바 한인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한글교육이었다. 쿠바지방회는 1923년 민성국어학교를 설립하고 후원하다가 1932년 지방회 직속 기관으로 전환한 후 모든 운영비를 제공했다.
또 선생은 1925년부터 3년 동안 교사로, 1931년부터 5년간은 교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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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임천택 선생은 야학강당을 개설하고 한인노동자와 2세를 위한 한글교육을 1942년까지 지속했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한인의 장래는 한인에 달려 있다는 취지로 1932년 3월10일 청년학원을 설립했다. 이후 청년학원 원장 겸 교사로 교육사업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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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청년학원은 2년 만에 문을 닫았지만 한국역사강연회를 비롯해 토론회, 동화회, 독서회 등 90여 회의 모임을 갖고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배양했다. 또 1938년 대한여자애국단 쿠바지부가 설립되자 고문으로 추대됐으며 그의 지도 아래 광복군을 후원하기 위해 1전 모금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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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1937년부 터 독립자금 모금은 물론 쿠바 거주 한인동포 권익보호에 헌신한 임천택 선생의 공로를 인정해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이후 쿠바에서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을 전개한 인물들을 발굴하여 꾸준히 독립유공자로 선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