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 TAIWAN

타이완 항일 의병 투쟁의 선봉
조명하
타이완 섬에서 총이나 폭탄이 아닌 도검을 이용하여 일본의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 암살을 시도했다.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
- 조명하 의사, 1928년 10월 10일 오전 10시 타이완 타이페이의 일제 처형장에서 순국 직전 남긴 유언 -


조명하 의사는 1927년 타이완, 타이중시 계광로 52번지에 있는 부귀원이란 찻집에서 매달 10원을 받고 일하면서 일제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타이완 원주민들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
조의사는 육군 특별검열사 구니노미야 구니히코가 일본 왕 히로히토의 장인이며 육군대장, 군사 참의관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는 구니노미야가 타이중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일정을 알아냈다.
‘이곳에서 일본 왕족인 구니노미야를 내 손으로 주살하여 우리 겨레의 한을 풀리라’
조명하 의사는 타이중 역에서 타이완지사관사에 이르는 노정과 구니노미야가 일박할 예정인 지사관사 부근의 정황 등을 세밀히 정찰했다.
마침내 5월 14일 운명의 날이 밝아오자 단도에 극약을 바른 다음 이를 가슴에 품고 예정 장소로 나갔다.
구니노미야를 태운 무개차(지붕 없는 차)가 오전 9시 55분쯤 타이중 도서관 앞 사거리 지점에서 좌회전 하려는 순간 환영 군중 사이에 서있던 의사는 단도를 빼내 들고 날쌔게 자동차 뒤쪽에 뛰어 올랐다.
위험을 느낀 운전사는 속력을 냈고 무개차에 동승했던 오누마 무관장이 구니노미야의 몸을 감쌌다. 그 순간 조의사는 그를 향해 단검을 힘껏 던졌다. 칼은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쳐 가벼운 상처를 입힌 뒤 운전사의 등에 맞았다.
조의사는 거사 후 당황하는 중국 군중을 향해
“당신들은 놀라지 말라. 나는 대한을 위해 복수하는 것이다.”
고 말했다.

조명하
Story
동아시아 침략의 주범 일본 육군의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중상 입고 사망
조의사는 아수라장이 된 그 자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일본 군경들에게 포박을 당하였다.
조의사는 6월 14일 타이페이 형무소로 이송되어 수형자 번호 152번으로 독방에 수감되었다.
조의사는 7월 18일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10월 10일 타이페이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의사의 나이 스물 네 살 나던 실로 꽃다운 나이일 때였다.


조명하 의사의 의거 사실을 알리는 신문 기사.(중외일보 1928년 6월 15일자 기사 사본) 의거는 5월에 실행되었지만 기사 게재가 금지되다가 해금되어 6월에야 소식을 전한 것

조명하 의사 의거지 사진. 당시 타이중(臺中) 도서관이 있던 곳으로 이후 합작금고가 들어섰다.
의거의 영향
이 사건을 시작으로 이봉창 의사(1932년 1월) 및 윤봉길 의사(1932년 4월)의 의거가 뒤따랐다.
중국 총통 장개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는 '노예상태에 놓여 진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 해방시킨다.'는 내용의 카이로 선언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과 함께 '4대 의사로' 꼽히기도 하지만 조명하 의사에 대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