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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며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일제는 집요하게 이범진의 국내 소환을 요구한다.
"귀환명령은 일본의 압박에 따른 것이므로 러시아에 남아라."
고종은 위와 같은 밀명을 전하며
공사관을 폐쇄하고 이범진을 공사직에서 면직한다.
이범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데 힘쓴다.
1907년 헤이그 특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그들의 행동을 물신양면으로 돕는다.

판테레이몬스카야,
현 페스텔랴 거리 5번지 5층 건물 중
3층 5-6호실에 이범진 공사 상주.
1908년 봄에는 이위종을 연해주로 보내 독립운동 단체 동의회 창설을 지원하며 1만 루블을 자금으로 내놓는다. 현재 가치로 수십억 정도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대한제국이 망국에 이르자 이범진은 모든 재산을 정리해 독립자금으로 내놓는다.
이때 그가 내놓은 자금은 1만2천 루블이었다.
이범진 선생에게 내린 광무황제(고종)의 친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경술국치를 맞은 이범진 선생이 순국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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